사랑방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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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랑방 작성일04-09-18 17:38 조회3,1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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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다양한 목회 사랑방 교회 탐방
‘사랑방 공동체’
철저한 신학화 작업의 결과
가족전체가 함께 드리는 수요예배
갓난아이부터 초등학교 아이들, 어른이 다 한자리에 앉아 앉은뱅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펴놓은 성경을 교독하며 읽고 있다. 꽤 긴시간 계속되는 강해 설교에도ㅛ 장난을 치거나 떠드는 아이는 없다. 이날 예배의 기도는 처음 서리집사로 임명받은 라집사님의 떨리는 첫 대표기도로 이어졌다.
예배가 끝난 후 다 한자리에 모여 교회에서 준비한 식사를 같이 한다. 된장국과 깈치 그리고 쉽게 누구나 퍼 먹을 수 있도록 뷔페형으로 나온 넓은 접시에서 밥을 각자 덜어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방교회 수요예배의 모습이다. 설교는 교인들이 매일 한장씩 공통으로 읽는 성경의 한장을 택해 강해설교를 한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서서울 금요사랑방 성서모임, 멀게는 능곡, 원당, 연신내부터 가깝게는 수유리에 이르기까지 한가정 한가정이 모여 들고 있다. 교인가정집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금요사랑방 모임은 첫인상이 성경공부 모임이라기 보다는 오랫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친척모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한쪽방에서는 21개월된 두레부터 중학교에 입학한 원혁에 이르기까지 일곱명의 어린이 사랑방 공동체식구들이 모여있다. 제일 큰 형인 원혁이는 서서울사랑방의 어린 동생들의 장난감을 챙겨주랴, 간식을 챙겨주랴 바쁘다. 사랑방 공동체의 묵시적인 원칙은 어떤 모임이든지 가족전체가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대예배이든 수요예배이든 금요성서 모임이든 마찬가지이다.
암송대회도 어른들과 같이
교회에서 진행하는 전체 프로그램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연령별로 나뉘는 일이 없다. “암송대회때는 저희가 손해예요. 어른들이 상을 다 차지하는 걸요. 어린이 사랑방 식구는 별로 타지 못해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정한의 불만이다. 정한은 곧 열리는 암송대회 준비를 위해 로마서 12장을 외우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나 보다.
아직 도착을 안한 식구들을 기다리며 거실에 놓은 커다란 상위에는 봄냄새가 물씬 풍긴 구절판이 차려져 있다. 원당에서 출발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네명의 가족과 같이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드디어 얼마전 꾸러기 학교를 졸업한 어진이, 어람이도 엄마와 함께 도착했다. 모두 밥을 먹게 되었다고 반가운 표정들이다. “처음 교회에 왔을때 생각이 납니다. 앉기만 하면 같이 먹더군요.” 사랑방 교회에 나온지 1년이 되어간다는 김일호 집사는 이렇게 모여 먹는 것이 큰 교제가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직신학시간을 방불케 하는 금요성서모임
토론이 길어지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
금요성서모임은 각 지역별로 가정에서 모이는 성경공부모임이다. 성경을 읽고 같이 묵상하며 자신의 생각을 토론식으로 발표하는 성경공부모임에 교역자는 참여하지 않는다. 단 인도자는 교역자가 작성한 참고물을 미리 공부해야 한다.
성경공부에 들어가자 조금전 식사시간의 느슨한 분위기는 마치 신학교 학생들이 조직신학과목에서 집요하게 한 질문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열띤 토론장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날 주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왜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믿으라 하지 않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복음은 인류시조부터 있었나요? 예수님 이후가 아닙니까?”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복음은 급박한 느낌이 드는데 마태복음에서 그렇지 않아요. 왜이죠?”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은 집요할만큼 한가지 질문에 대해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한사람이 주어진 개역성경의 본문을 읽고 “이게 무슨 뜻이죠?”하자 홍정길 집사는 서재에서 여러 번역 성경을 꺼내오기 시작한다. 분명한 뜻을 알기 위해서이다. NIV, 표준새번역, 공동변역이 책상에 놓여졌고 한사람이 읽어준다.
적용도 다양해 조금전의 여느 한 구역모임의 두리뭉실해 보이던 교인들이 각자 다른 관점에서 각자 다른 적용을 한다.
성경공부의 교재는 중요한 교리의 내용을 다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교회에서 제작된 책자였는데 이날 성경공부 인도자는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김한규집사의 답변도 만만치 않았다. 성경공부는 11시 반이 넘어서 끝났다. 일찍 끝난 편이라고 한다. 사실, 토론이 길어질 때는 자정을 넘어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방의 신학이 금요성서모임에서 시작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랑방공동체는 이러한 철저한 귀납적 성경공부의 신학화 작업을 통해 태동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랑방의 소망인 꾸러기 학교
『꾸러기 학교』는 단순한 놀이방이 아니다. 2세들에게 교회의 비젼과 삶의 스타일을 물려주고자 교인자녀인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꾸러기 학교는 사랑방교회의 공동체신학 목표인『잃어버린 사람됨을 회복하고 사람들의 다양성을 신뢰하는 가운데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을 이루는 하나의 교육의 장이다.
지난 4일에 개강한 꾸러기 학교에는 열두명의 꼬마가 입학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꾸러기 학교는 자신의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놀게해주는 놀이장소이다. 놀이방, 공부방, 그룹으로 모일 수 있는 세개의 큰 방에 『꾸러기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택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자연학습, 현장학습을 중시해 연극관람, 경찰서 방문등 외출해서 받는 교육도 많다. 무엇보다 『꾸러기들』은 포천 농장에서 흙을 고르며 씨뿌리기를 하며 씨뿌리는 것을 재밌어 한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아
사랑방의 신학은 새로운 신학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한 시도라고 정태일 목사는 해석한다. 사랑방교회에 여러 실험적인 모델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계속 시도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랑방교회에 여러 실험적인 모델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계속 시도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공동체가 개인의 다양성과 공동의 목표성을 함께 수용할 때에야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을 체험한다는 논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교회상과 신학적 관점에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 가졌던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고 정태일 목사는 말한다. 정목사는 공동체신학을 펴게 된 동기를 ‘역사적 과제와 인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현대에 교회는 인간구원의 진리를 실현하는 역사적 두구로서 그 모습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랑방지 창간호(84년 4월 28일)에서 밝힌 바 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피상적인 관계에만 머무르는 일시적인 인간관계로 전락하는 아픔을 목회 현장에서 체험하고난 결과였다. ‘교회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현실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성숙시켜 나아가는 삶의 터전’이기에 사랑방교회는 교인들의 삶을 매우 중시한다. “저희 교인들은 형식에서는 자유롭지만 삶에서는 철저합니다”고 정목사는 덧붙였다.
삶에서는 철저합니다.
하나님나라는 교회를 통해 경험한다는 것이 사랑방 교회의 철저한 신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 예배때마다 감격이 있어야 하고 그 감격의 결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사랑방교회의 구성원의 특징은 새로 들어오는 구성원보다 초창기의 청년구성원이 거의 그대로 남아 가족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방교회의 출판과 교육을 담당하는 고유진, 박진용, 홍원숙 전도사 역시 사랑방 출신이고 장신대에 재학중인 몇몇 신대원생들도 사랑방 교회에서 자라난 세대들이다.
사랑방교회의 고민
사랑방교회에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층이 약하다는 것이 그점이다. 처음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출발했던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가정을 꾸려나가는 장년층이 되었고 2세들은 취학 아동층이 많다. 그러다보니 빈공간이 생긴다. 새로운 청년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삶을 모두 나누는 사랑방교회의 특성상 자신만의 개인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요즘 청년들에게는 사랑방은 ‘부담스러운 교회’가 아닐 수 없다. 또 새로 들어온 공동체식구들은 탄탄하게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랑방의 구성원들을 보고 자신들이 낄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1년간 등록을 미루도록 배려해 주는 것은 이때문이다.
“삶을 같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고 정목사는 말한다. 가족전체가 움직이는 공동체이다보니 부모님이 아직 믿지 않는 아동이나 학생들, 혹은 남편이 아직 안믿는 가정들도 교회에 함께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정목사는 그점이 교회의 한계일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한달에 한번씩 자연을 찾는 야외 예배때는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얼마전 길을 잃은 사랑방교회의 ‘한 꾸러기’가 울지도 않고 경찰서를 찾아 “아저씨 집 좀 찾아주세요” 당당히 요구해 한 경찰을 놀라게 했다. 아이들의 꾸밈이 없고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동대문경찰서를 찾아 경찰 아저씨들과 지내본 경험이 있는 사랑방교회의 ‘꾸러기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삶의 당당함은 사랑방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서나 발견 할 수 있다. 어린 ‘꾸러기’에서 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코이노니아를 이룬 참된 교제, 어린 꾸러기들에서부터 어른까지 철저하게 삶에 베어있는 사랑방교회의 공동체성 신학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터질듯한 에너지를 교인들에게서 느낍니다”고 정목사는 말한다.
정태일 목사 인터뷰
어떻게 공동체에 중점을 둔 목회를 구상하게 되셨습니까?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 장점이 있다면 뭔가 다르게 하려는 창의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매일 가는 학교길도 갈 때마다 다른 길로 다니곤 했었으니까요. 신앙생활도 그러했습니다.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순수하게 한국의 토양에 맞는 목회를 염두하고 일부러 유학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목회를 준비하면서 좌절을 겪고 있는 후배들도 많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일은 그 일이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든, 선교사이든, 일반교회이든, 전적인 헌신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워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각오해야 합니다. 물질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자신뿐아니라 가족전체의 희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공부하고 싶은 욕구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희생이 따르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교ㅗ히는 일반 사회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이므로 연륜을 필요로 합니다. 성장에 필요한 단계는 빠지지 않고 거쳐야 하므로 자신의 세대에서 다 열매를 따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사랑방교회의 신학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방의 신학은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교회, 참된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종말적으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더 절박한 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바로 이곳에서(here and now)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땅의 삶의 과정에서 지금 실제로 영생을 누리고 있는가가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관념이 아닌 ‘삶’이기에 사랑방공동체는 삶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역할이 교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의 본래적 삶이란 무엇입니까?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단독목회 12년째를 접어들지만 지금도 사랑방교회는 그 본래적인 삶이 무엇인가 추구하기 위한 한 과정중에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특징은 모든 목표설정 과정이 귀납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교역자들은 어떤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경말씀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은 진리를 실행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에 의한 깨달음이므로 목회자 한 사람의 리더쉽, 인격, 능력의 한계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스스로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위에 권위가 서있기 때문에 그 힘이 강합니다. 따라서 먼 안목으로 보아 목회자 중심의 연역적인 목표설정보다 훨씬 견고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해서 그려진 다이나믹한 리더쉽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어떤 정해진 기금이 없어도 종종 필요한 사업이 있을 때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곤 하는 힘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얼마전 사랑방교회는 홍천에 공동체훈련을 위한 섬김의 집을 세웠다).
신학교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졸업하기전 자신을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강의를 통해 신대원, 목연, 목사계속 교육원까지 학생들을 대하면서 늘 느끼는 아쉬움은 근본적인 토대를 갖추려고 애쓰지 않고 안일한 태도로 이미 만들어진, 당장 대용할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식 지식, 프로그램습득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빨리 어른 대우받고 싶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신대원에 재학중인 학생들에 전도사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 전임은 있어도 교육전도사는 없습니다. 일정한 수입을 가질 수 없는 신학생의 여건상 교회사역을 하지 않는 것은 물질의 궁핍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문제는 좀 자유롭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쓰실자인데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이 보시는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훈련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아쉽게 느끼는 훈련은 인격과 삶의 훈련입니다. 신학교때 카톨릭에서처럼 수도원생활은 할 수 없어도 기본영성생활은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커리큘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인데 왜 삶을 가르치는데 이렇게도 약한가 하는 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인격과 삶의 훈련 없이는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본받으라는 것과 같이 기독교적인 리더쉽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리더쉽은 독재형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한 리더쉽도 필요하나 구성원을 위해 민주적으로도 바뀔수 있는 리더쉽이 아쉽습니다. 특별히, 섬기는 자로서의 기독교적인 리더쉽을 애타게 부르짖었던 주선애 교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교회가 그 본질을 잊는 것
한국교회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양적인 성장이 멈추었다고 해서 위기라고 하는데 전 좀 생각이 다릅니다. 진정한 위는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잊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기는 역사상 계속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위기극복의 방법은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찾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투구한다면 문제는 극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코이노니아, 교회, 공동체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해하고 있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코이노니아를 친교, 봉사 정도라고 보고 있지 않나요?
세미나 신드롬이 일고 있는 요즘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졸업후에 여러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목회자를 볼 때 솔직히 한마디 해주고 싶은 생각입니다. 결국 신학함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가 우선 갖춰야 할 것은 기본적인 신학체계입니다. 교회론이 분명해야 하고 교회상이 어떠한 것인지 평신도에게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 고집으로 행하게 됩니다.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취재.정리 옥설 기자
‘사랑방 공동체’
철저한 신학화 작업의 결과
가족전체가 함께 드리는 수요예배
갓난아이부터 초등학교 아이들, 어른이 다 한자리에 앉아 앉은뱅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펴놓은 성경을 교독하며 읽고 있다. 꽤 긴시간 계속되는 강해 설교에도ㅛ 장난을 치거나 떠드는 아이는 없다. 이날 예배의 기도는 처음 서리집사로 임명받은 라집사님의 떨리는 첫 대표기도로 이어졌다.
예배가 끝난 후 다 한자리에 모여 교회에서 준비한 식사를 같이 한다. 된장국과 깈치 그리고 쉽게 누구나 퍼 먹을 수 있도록 뷔페형으로 나온 넓은 접시에서 밥을 각자 덜어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방교회 수요예배의 모습이다. 설교는 교인들이 매일 한장씩 공통으로 읽는 성경의 한장을 택해 강해설교를 한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서서울 금요사랑방 성서모임, 멀게는 능곡, 원당, 연신내부터 가깝게는 수유리에 이르기까지 한가정 한가정이 모여 들고 있다. 교인가정집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금요사랑방 모임은 첫인상이 성경공부 모임이라기 보다는 오랫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친척모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한쪽방에서는 21개월된 두레부터 중학교에 입학한 원혁에 이르기까지 일곱명의 어린이 사랑방 공동체식구들이 모여있다. 제일 큰 형인 원혁이는 서서울사랑방의 어린 동생들의 장난감을 챙겨주랴, 간식을 챙겨주랴 바쁘다. 사랑방 공동체의 묵시적인 원칙은 어떤 모임이든지 가족전체가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대예배이든 수요예배이든 금요성서 모임이든 마찬가지이다.
암송대회도 어른들과 같이
교회에서 진행하는 전체 프로그램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연령별로 나뉘는 일이 없다. “암송대회때는 저희가 손해예요. 어른들이 상을 다 차지하는 걸요. 어린이 사랑방 식구는 별로 타지 못해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정한의 불만이다. 정한은 곧 열리는 암송대회 준비를 위해 로마서 12장을 외우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나 보다.
아직 도착을 안한 식구들을 기다리며 거실에 놓은 커다란 상위에는 봄냄새가 물씬 풍긴 구절판이 차려져 있다. 원당에서 출발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네명의 가족과 같이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드디어 얼마전 꾸러기 학교를 졸업한 어진이, 어람이도 엄마와 함께 도착했다. 모두 밥을 먹게 되었다고 반가운 표정들이다. “처음 교회에 왔을때 생각이 납니다. 앉기만 하면 같이 먹더군요.” 사랑방 교회에 나온지 1년이 되어간다는 김일호 집사는 이렇게 모여 먹는 것이 큰 교제가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직신학시간을 방불케 하는 금요성서모임
토론이 길어지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
금요성서모임은 각 지역별로 가정에서 모이는 성경공부모임이다. 성경을 읽고 같이 묵상하며 자신의 생각을 토론식으로 발표하는 성경공부모임에 교역자는 참여하지 않는다. 단 인도자는 교역자가 작성한 참고물을 미리 공부해야 한다.
성경공부에 들어가자 조금전 식사시간의 느슨한 분위기는 마치 신학교 학생들이 조직신학과목에서 집요하게 한 질문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열띤 토론장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날 주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왜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믿으라 하지 않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복음은 인류시조부터 있었나요? 예수님 이후가 아닙니까?”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복음은 급박한 느낌이 드는데 마태복음에서 그렇지 않아요. 왜이죠?”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은 집요할만큼 한가지 질문에 대해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한사람이 주어진 개역성경의 본문을 읽고 “이게 무슨 뜻이죠?”하자 홍정길 집사는 서재에서 여러 번역 성경을 꺼내오기 시작한다. 분명한 뜻을 알기 위해서이다. NIV, 표준새번역, 공동변역이 책상에 놓여졌고 한사람이 읽어준다.
적용도 다양해 조금전의 여느 한 구역모임의 두리뭉실해 보이던 교인들이 각자 다른 관점에서 각자 다른 적용을 한다.
성경공부의 교재는 중요한 교리의 내용을 다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교회에서 제작된 책자였는데 이날 성경공부 인도자는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김한규집사의 답변도 만만치 않았다. 성경공부는 11시 반이 넘어서 끝났다. 일찍 끝난 편이라고 한다. 사실, 토론이 길어질 때는 자정을 넘어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방의 신학이 금요성서모임에서 시작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랑방공동체는 이러한 철저한 귀납적 성경공부의 신학화 작업을 통해 태동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랑방의 소망인 꾸러기 학교
『꾸러기 학교』는 단순한 놀이방이 아니다. 2세들에게 교회의 비젼과 삶의 스타일을 물려주고자 교인자녀인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꾸러기 학교는 사랑방교회의 공동체신학 목표인『잃어버린 사람됨을 회복하고 사람들의 다양성을 신뢰하는 가운데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을 이루는 하나의 교육의 장이다.
지난 4일에 개강한 꾸러기 학교에는 열두명의 꼬마가 입학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꾸러기 학교는 자신의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놀게해주는 놀이장소이다. 놀이방, 공부방, 그룹으로 모일 수 있는 세개의 큰 방에 『꾸러기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택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자연학습, 현장학습을 중시해 연극관람, 경찰서 방문등 외출해서 받는 교육도 많다. 무엇보다 『꾸러기들』은 포천 농장에서 흙을 고르며 씨뿌리기를 하며 씨뿌리는 것을 재밌어 한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아
사랑방의 신학은 새로운 신학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한 시도라고 정태일 목사는 해석한다. 사랑방교회에 여러 실험적인 모델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계속 시도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랑방교회에 여러 실험적인 모델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계속 시도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공동체가 개인의 다양성과 공동의 목표성을 함께 수용할 때에야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을 체험한다는 논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교회상과 신학적 관점에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 가졌던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고 정태일 목사는 말한다. 정목사는 공동체신학을 펴게 된 동기를 ‘역사적 과제와 인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현대에 교회는 인간구원의 진리를 실현하는 역사적 두구로서 그 모습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랑방지 창간호(84년 4월 28일)에서 밝힌 바 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피상적인 관계에만 머무르는 일시적인 인간관계로 전락하는 아픔을 목회 현장에서 체험하고난 결과였다. ‘교회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현실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성숙시켜 나아가는 삶의 터전’이기에 사랑방교회는 교인들의 삶을 매우 중시한다. “저희 교인들은 형식에서는 자유롭지만 삶에서는 철저합니다”고 정목사는 덧붙였다.
삶에서는 철저합니다.
하나님나라는 교회를 통해 경험한다는 것이 사랑방 교회의 철저한 신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 예배때마다 감격이 있어야 하고 그 감격의 결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사랑방교회의 구성원의 특징은 새로 들어오는 구성원보다 초창기의 청년구성원이 거의 그대로 남아 가족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방교회의 출판과 교육을 담당하는 고유진, 박진용, 홍원숙 전도사 역시 사랑방 출신이고 장신대에 재학중인 몇몇 신대원생들도 사랑방 교회에서 자라난 세대들이다.
사랑방교회의 고민
사랑방교회에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층이 약하다는 것이 그점이다. 처음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출발했던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가정을 꾸려나가는 장년층이 되었고 2세들은 취학 아동층이 많다. 그러다보니 빈공간이 생긴다. 새로운 청년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삶을 모두 나누는 사랑방교회의 특성상 자신만의 개인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요즘 청년들에게는 사랑방은 ‘부담스러운 교회’가 아닐 수 없다. 또 새로 들어온 공동체식구들은 탄탄하게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랑방의 구성원들을 보고 자신들이 낄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1년간 등록을 미루도록 배려해 주는 것은 이때문이다.
“삶을 같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고 정목사는 말한다. 가족전체가 움직이는 공동체이다보니 부모님이 아직 믿지 않는 아동이나 학생들, 혹은 남편이 아직 안믿는 가정들도 교회에 함께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정목사는 그점이 교회의 한계일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한달에 한번씩 자연을 찾는 야외 예배때는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얼마전 길을 잃은 사랑방교회의 ‘한 꾸러기’가 울지도 않고 경찰서를 찾아 “아저씨 집 좀 찾아주세요” 당당히 요구해 한 경찰을 놀라게 했다. 아이들의 꾸밈이 없고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동대문경찰서를 찾아 경찰 아저씨들과 지내본 경험이 있는 사랑방교회의 ‘꾸러기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삶의 당당함은 사랑방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서나 발견 할 수 있다. 어린 ‘꾸러기’에서 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코이노니아를 이룬 참된 교제, 어린 꾸러기들에서부터 어른까지 철저하게 삶에 베어있는 사랑방교회의 공동체성 신학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터질듯한 에너지를 교인들에게서 느낍니다”고 정목사는 말한다.
정태일 목사 인터뷰
어떻게 공동체에 중점을 둔 목회를 구상하게 되셨습니까?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 장점이 있다면 뭔가 다르게 하려는 창의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매일 가는 학교길도 갈 때마다 다른 길로 다니곤 했었으니까요. 신앙생활도 그러했습니다.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순수하게 한국의 토양에 맞는 목회를 염두하고 일부러 유학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목회를 준비하면서 좌절을 겪고 있는 후배들도 많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일은 그 일이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든, 선교사이든, 일반교회이든, 전적인 헌신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워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각오해야 합니다. 물질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자신뿐아니라 가족전체의 희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공부하고 싶은 욕구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희생이 따르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교ㅗ히는 일반 사회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이므로 연륜을 필요로 합니다. 성장에 필요한 단계는 빠지지 않고 거쳐야 하므로 자신의 세대에서 다 열매를 따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사랑방교회의 신학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방의 신학은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교회, 참된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종말적으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더 절박한 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바로 이곳에서(here and now)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땅의 삶의 과정에서 지금 실제로 영생을 누리고 있는가가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관념이 아닌 ‘삶’이기에 사랑방공동체는 삶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역할이 교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의 본래적 삶이란 무엇입니까?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단독목회 12년째를 접어들지만 지금도 사랑방교회는 그 본래적인 삶이 무엇인가 추구하기 위한 한 과정중에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특징은 모든 목표설정 과정이 귀납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교역자들은 어떤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경말씀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은 진리를 실행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에 의한 깨달음이므로 목회자 한 사람의 리더쉽, 인격, 능력의 한계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스스로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위에 권위가 서있기 때문에 그 힘이 강합니다. 따라서 먼 안목으로 보아 목회자 중심의 연역적인 목표설정보다 훨씬 견고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해서 그려진 다이나믹한 리더쉽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어떤 정해진 기금이 없어도 종종 필요한 사업이 있을 때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곤 하는 힘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얼마전 사랑방교회는 홍천에 공동체훈련을 위한 섬김의 집을 세웠다).
신학교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졸업하기전 자신을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강의를 통해 신대원, 목연, 목사계속 교육원까지 학생들을 대하면서 늘 느끼는 아쉬움은 근본적인 토대를 갖추려고 애쓰지 않고 안일한 태도로 이미 만들어진, 당장 대용할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식 지식, 프로그램습득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빨리 어른 대우받고 싶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신대원에 재학중인 학생들에 전도사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 전임은 있어도 교육전도사는 없습니다. 일정한 수입을 가질 수 없는 신학생의 여건상 교회사역을 하지 않는 것은 물질의 궁핍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문제는 좀 자유롭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쓰실자인데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이 보시는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훈련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아쉽게 느끼는 훈련은 인격과 삶의 훈련입니다. 신학교때 카톨릭에서처럼 수도원생활은 할 수 없어도 기본영성생활은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커리큘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인데 왜 삶을 가르치는데 이렇게도 약한가 하는 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인격과 삶의 훈련 없이는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본받으라는 것과 같이 기독교적인 리더쉽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리더쉽은 독재형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한 리더쉽도 필요하나 구성원을 위해 민주적으로도 바뀔수 있는 리더쉽이 아쉽습니다. 특별히, 섬기는 자로서의 기독교적인 리더쉽을 애타게 부르짖었던 주선애 교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교회가 그 본질을 잊는 것
한국교회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양적인 성장이 멈추었다고 해서 위기라고 하는데 전 좀 생각이 다릅니다. 진정한 위는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잊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기는 역사상 계속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위기극복의 방법은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찾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투구한다면 문제는 극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코이노니아, 교회, 공동체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해하고 있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코이노니아를 친교, 봉사 정도라고 보고 있지 않나요?
세미나 신드롬이 일고 있는 요즘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졸업후에 여러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목회자를 볼 때 솔직히 한마디 해주고 싶은 생각입니다. 결국 신학함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가 우선 갖춰야 할 것은 기본적인 신학체계입니다. 교회론이 분명해야 하고 교회상이 어떠한 것인지 평신도에게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 고집으로 행하게 됩니다.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취재.정리 옥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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